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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4.02.28]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지속 가능하지 않은 되먹임
2024-03-06경향신문 2024년 2월 28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402281957015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기독교 성경에 나오는 얘기다. 세속의 재산 얘기일 리는 없지만,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진다는 부익부 빈익빈이 떠오른다. 예금액이 많은 사람은 금융소득이 더해져 예금이 점점 늘고, 이자를 내지 못하면 채무자의 채무는 점점 늘어난다. 늘어나면 늘어났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음에는 더 늘고, 줄어들면 줄어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다음에는 더 주는 현상이 우리 주변에 많다. 양의 되먹임 혹은 늘어나는 되먹임이라 부르는 효과다. 감염병의 확산도 늘어나는 되먹임을 보여준다. 한 사람이 매일 주변의 한 사람을 감염시킨다면, 첫날 한 명의 감염자는 이튿날에는 두 명이 된다. 이렇게 두 명으로 늘어난 감염자는 또 하루 안에 각각 한 명씩을 감염시키니, 사흘째 되는 날에는 감염자가 네 명이 되고, 나흘이 되면 여덟 명이 된다. 늘면 더 늘어나고 그래서 다음에는 더 늘어나는 전형적인 늘어나는 되먹임 효과다. 한편 방역 당국과 모두의 노력으로 감염의 확산을 잘 막아내면 내일은 오늘보다 감염자가 줄고, 감염자가 줄어들어 신규 감염자도 줄면 모레의 감염자는 더 줄어든다. 이것도 늘어나는 되먹임이다. 늘어나는 되먹임은 항상 늘어나기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대기 중 이산화탄소가 늘면 지구의 기온이 상승하고 바다에서 방출되는 이산화탄소가 늘어나는 것은 늘어나는 되먹임이다. 모두의 노력으로 이산화탄소 농도를 크게 줄이면 마찬가지의 늘어나는 되먹임 효과로 지구 기온 상승을 멈출 수 있다. 늘면 늘고 줄면 주는 것이 늘어나는 되먹임이다. 늘면 줄고 줄면 느는, 거꾸로 작용하는 것이 줄어드는 되먹임이다. 집에서 이용하는 온도 조절기가 대표적이다. 설정해놓은 기준보다 온도가 오르면 조절기는 난방 장치의 작동을 멈춰서 이후에는 집의 온도가 내려가고, 온도가 낮아지면 난방 장치를 가동해 온도가 오르게 된다. 주식시장 주가의 움직임도 폭락과 폭등이 없는 평상시에는 줄어드는 되먹임 효과를 보여준다. 주가가 오르면 수익을 현금화하려는 사람이 늘어 매도 주문이 많아져 주가가 내려가고, 주가가 내려가면 낮은 가격에 매수하려는 사람이 늘어 거꾸로 주가가 오른다. 줄어드는 되먹임 효과의 끝판왕은 생명이다. 우리 몸은 체온이 오르면 땀을 흘려 체온을 내린다. 액체인 물이 기체인 수증기로 기화하면 많은 에너지를 빼앗아 주변 온도를 내리는 것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겨울날 기온이 내려가면 피부 모공 주변 근육이 수축해 닭살이 되면서 많은 털이 일렬로 똑바로 선다. 누워있던 털을 세우면 피부 주변 공기층이 두꺼워진다. 물은 기화열이 상당히 큰 물질이라는 것과 공기는 뛰어난 열의 부도체라는 물리학의 현상을 이용해 우리 몸은 줄어드는 되먹임으로 일정한 체온을 유지한다. 혈액 속 당분의 양이 늘면 인슐린을 분비해 혈당을 줄이고, 혈당이 줄면 글루카곤을 분비해 다시 혈당을 늘린다. 여러 종류의 경이로운 줄어드는 되먹임이 생명이 보여주는 놀라운 항상성의 작동 원리다. 자연은 대개 늘어나는 되먹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인위적인 개입이 없다면, 자연은 늘면 줄이고 줄면 늘려 결국 평형상태에 도달한다. 가진 에너지가 많아 온도가 높은 쪽은 가진 것이 적어 온도가 낮은 쪽에 에너지를 전달하고, 담긴 물의 높이가 다른 물통을 나란히 연결하면 수위가 높은 쪽 물이 낮은 쪽으로 이동해 양쪽의 수위가 같아진다. 가만히 두면 자연은 결국 모든 곳이 균일한 평형상태에 도달한다. 물리학의 평형상태를 보면서 사회를 떠올린다. 가진 자가 더 가지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고 있는 작은 것마저 빼앗기는 늘어나는 되먹임은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 심지어 만약 x의 증가 속도가 x의 a제곱(a>1)에 비례하면 x는 유한한 시간에 무한대에 도달해 발산하는 특이점이 도래한다. 간단한 미적분으로 보일 수 있는 명확한 수학적 진실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점점 가속해 늘어나기만 하는 사회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구의 기후도 마찬가지다. 우리 인간이 지속 가능한 환경에서 살아가려면 현재 급격히 진행되고 있는 늘어나는 되먹임을 멈추어야 한다. 늘면 더 늘고 그래서 또 더 늘어난다. 해결을 미래로 미룰수록 해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아쉽게도 어제 미처 호미로 막지 못했다면 오늘은 그래도 가래로 막을 수 있다. 내일로 미루면 가래로도 못 막는다. 바로 지금이 해결의 적기다.
[경향신문 2024.01.31]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행복, 애쓰지 않으면 머물 수도 없다
2024-02-21경향신문 2024년 1월 31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76669?sid=110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다. 가정뿐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어, 병에 걸려서, 외로워서…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제각각 다르다. 행복은 어쩌면 높은 산봉우리 정상, 손바닥만 한 좁은 땅 같은 곳일지 모른다. 동쪽으로 삐끗해 한 걸음 옮기면 건강을 잃는 내리막으로 접어들고, 오랜 친구 한 명을 잃는 남쪽 방향 한 걸음으로 큰 불행이 시작될 수도 있다. 행복이라는 불안정한 산꼭대기에서 저 아래 놓인 제각각 다른 수많은 불행의 골짜기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은 지천이다. 어느 방향으로라도 잠깐 발을 헛디디면 굴러떨어질 수 있는 한 뼘 크기 장소가 행복이 놓인 곳이다. 지금의 행복이 앞으로의 여전한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어쩔 수 없는 물리학자인 나는 톨스토이의 멋진 문장에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떠올린다. 1부터 10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는 10장의 카드를 나란히 순서대로 늘어놓을 수 있는 가짓수는 딱 하나지만, 이렇게 정렬되어 있는 카드를 뒤죽박죽 섞을 수 있는 가짓수는 정말 크다. 엔트로피의 값은 가능한 가짓수에 관련되어서, 순서대로 정렬된 카드 더미의 엔트로피는 작고 뒤죽박죽 섞인 카드 더미의 엔트로피는 크다. 눈 감고 섞으면 우리는 거의 항상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것을, 정렬된 카드가 뒤섞이는 것을 본다. 마구잡이로 섞었는데 카드 더미가 순서대로 정렬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 법칙의 구체적인 예다. 커다란 고립계의 엔트로피는 시간이 지나면서 늘어만 갈 뿐 줄어들지 않는다.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나는 유리컵도 마찬가지다. 바닥 여기저기 흩어진 파편 중 하나를 다른 위치로 옮겨도 우리는 여전히 산산조각이 난 상태를 보지만, 멀쩡한 유리컵에서 바닥 한가운데 유리 조각을 억지로 떼어 내서 물컵 손잡이로 옮기면 물을 담을 수 없는 무용지물 물컵이 된다. 어쩌면 행복은 멀쩡해 보여도 쉽게 깨지는 물컵 같은 것, 애써 순서대로 맞춰 놓은 정돈된 10장의 카드 같은 것일지 모른다. 카드 한 장이라도 순서를 바꾸면 흐트러지는 아슬아슬한 정돈된 상태가 행복이라면, 수만 가지 방법으로 깨져 바닥에 흩어져 산산조각 난 유리컵이 불행의 모습일지 모른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내가 자주 경험하듯 아무리 말끔하게 정돈해도 내 책상 위는 금방 어질러지고, 깨끗하게 빨아 잘 다린 셔츠도 하루 이틀만 지나면 여기저기 구김이 생겨 지저분해진다. 하지만 다시 책상을 정돈하고 셔츠를 빨아 다리면 낮은 엔트로피를 가진 말끔한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 과정에서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은 고립계가 아니어서, 책상을 정돈하는 이와 셔츠를 다리는 이의 노력이 엔트로피가 끊임없이 늘어나는 것을 막는다. 모두가 함께 연결되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오늘 출근길 거리 풍경이 어제와 다르지 않다면 수많은 이들의 노력에 감사할 일이다.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은 오늘의 내 삶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많은 사람 덕분이다. 불행의 이유는 제각각이라는 멋진 글에서 시작해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을 가만히 지켜봤다. 비록 불행의 엔트로피가 행복의 엔트로피보다 크다 해도,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 어쩔 수 없는 불행의 필연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늘어나는 불행을 되돌려 행복을 유지하려면, 어질러진 책상을 치우고 구겨진 셔츠를 다리듯,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비탈을 내려오는 커다란 바위를 끊임없이 다시 위로 밀어올리는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를 떠올린다. 불행으로 이어지는 비탈길은 끊임없는 노력으로만 돌이킬 수 있다. 노력 없이 유지되는 행복은 없다. 요즘 난 평화를 자주 떠올린다. 카드 한 장이 자리를 바꿔 늘어난 카드 더미의 엔트로피는 그 한 장을 되돌려 놓는 작은 노력으로 다시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여러 번 뒤섞인 카드 더미를 원래의 정돈된 상태로 되돌리려면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다. 잠깐 한눈판 사이 크게 훼손된 행복과 평화를 다시 회복하려면 큰 노력이 필요한 게 아닐까. 애쓰지 않으면 행복도, 평화도 곧 사라지는 게 아닐까. 함께 애써야 모두의 행복과 평화도, 그리고 찬연한 세상의 모습도 이어지는 게 아닐까. 애쓰지 않으면 머물 수도 없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노창동 교수님, 유튜브 안될과학 출연_매우고에너지 감마선 2/2
2024-02-13지난 1월 11일 구독자 103만명의 '안될과학' 채널에 노창동 교수님이 출연하셨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8x_0piYdJQw&ab_channel=%EC%95%88%EB%90%A0%EA%B3%BC%ED%95%99Unrealscience
노창동 교수님, 유튜브 안될과학 출연_매우고에너지 감마선 1/2
2024-02-13지난 1월 10일 구독자 103만명의 '안될과학' 채널에 노창동 교수님이 출연하셨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2zkQ1kW4pQ&ab_channel=%EC%95%88%EB%90%A0%EA%B3%BC%ED%95%99Unrealsci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