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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4월 22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222055005&code=99010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사이와 거리


우리는 친한 사람을 가까운 사이라 한다. 친한 친구였다가 오래 보지 못해 관계가 예전만 못해지면, 사이가 멀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이와의 심리적 거리를 물리적 거리로 표현한다. 단지 비유만은 아니다. 마음이 가까운 사람은 물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함께해도 불편하지 않다. 데이트하는 젊은 남녀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으로도 둘이 얼마나 깊게 사랑에 빠져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직장 회식자리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둘 사이의 직장 내 관계를 반영할 수도 있다. 마음의 거리는 공간에 투영되어 물리적 거리로 드러난다.

 
두 사람 사이의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는 단순한 상관관계 그 이상이다. 친해지면 딱 붙어 앉듯이, 심리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물리적으로도 가깝게 위치할 때가 많지만, 그 반대의 과정도 있다.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쳐 천천히 변해온 우리의 뇌가 심리적 거리와 물리적 거리에 대한 인과관계의 방향성을 현대의 논리학자처럼 엄밀하게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마음이 가까워 가까이 앉기도 하지만, 가까이 앉으면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얘기다. 텔레비전 화면에 클로즈업된 유명 연예인의 얼굴을 예로 들어보자. 직접 만나 얘기 나눠본 적 없는 사람의 얼굴을 이처럼 가까이서 보는 시각적 경험은 호모 사피엔스의 오랜 역사에서 극히 최근에 등장한 일이다. 수만년 동안 이처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가족과 친한 친구였을 뿐인 인간의 뇌는, 화면을 가득 채운 연예인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사람으로 해석한다. 연예인들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이유다. 교제를 시작한 남녀가 점점 더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함께하는 데이트의 형식이 어디서나 비슷한 것도 마찬가지다. 나란히 옆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은 데이트지만, 같은 영화를 둘이 각각 따로 집에서 보는 것은 데이트가 아니다. 우리는 가까워지면 가까워지고, 멀어지면 멀어진다.


한자로 ‘계(系)’라 적는 ‘시스템(system)’은 물리학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물리학을 적용해 이해하려는 대상이 계라면, 환경은 계를 둘러싼 모든 것을 일컫는다. 계라고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외부의 환경으로부터 완벽히 격리되어, 물질과 에너지, 어떤 것도 환경과 계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 수 없을 때, 물리학은 이런 계를 ‘고립계(isolated system)’라 한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주인공 로빈슨 크루소는 고립된 섬에서 오랜 시간을 살았다. 고립된 섬은 고립계일까? 답은 ‘아니요’다. 섬이 진정한 고립계라면 로빈슨 크루소는 그곳에 갈 수 없다. 고립계로는 어떤 물질 입자의 출입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인도에 쏟아지는 햇빛, 불어오는 바람, 해변에 밀려오는 파도, 이런 모든 주변 환경과의 연결이 없다면 섬의 생태가 유지될 수도 없다.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가기 전에도 그 섬은 고립계가 아니었다. 진정한 고립계라면, 그곳에 갈 수도, 그곳을 볼 수도 없다. 우리 사는 지구 위에 고립계는 없다.


외부로부터 격리되어 고립된 사람은 큰 고통을 겪는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죄수가 그 안에서 또 문제를 일으켜 독방에 갇히는 장면이 영화에 자주 나온다. 이미 감옥에 수용되어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죄수에 대한 징벌이 독방이라는 형태의, 감옥 안의 고립된 감옥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고립’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 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고립과 격리가 처벌이 되는 이유는 사람의 본성에 반하기 때문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다. 생명체는 고립계가 아닌 열린계다. 모든 생명은, 다른 모든 생명을 포함한 주변의 환경과 끊임없이 물질과 에너지, 정보를 교환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우리 모두는 어울려야 살 수 있는 존재다.


전 세계적인 규모로 확산되는 코로나19의 확진자 증가세가 한 풀 꺾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도 많은 나라에서 사람들 사이 거리 두기의 노력이 여전히 필요한 상황이다. 요즘 사회적 거리 두기를 물리적 거리 두기로 바꿔 부르자는, 필자도 공감하는 얘기가 있다. 전염병의 전파를 막는 것은 마음의 거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 거리다. 호모 사피엔스의 수만년 역사에서 마음의 거리는 곧 물리적 거리였다. 멀리 떨어져 살면서 마음의 거리를 가깝게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세상은 다르다. 현대의 과학기술이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다. 직접 만나지 않아 물리적 거리는 멀게 유지해 전염의 확산을 막으면서도, 사회적 거리, 마음의 거리는 가깝게 유지하는 것을 돕는 다양한 기술이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의 과학기술의 도움이,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소통하는 인간의 익숙한 연결 방식을 완전히 동등하게 대체할 수는 없다. 우리는 여전히 가까이서 체온을 느끼며 직접 만나 소통하기를 원하는 영장류다. 사회적 거리는 가깝게 유지하면서 물리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많은 이에게 고통인 이유 중 하나다.


     
한자 ‘사이 간(間)’이 들어가는 물리학 용어로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있다. ‘사이’가 정의되려면 양 끝에 놓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물질과 에너지로부터 영향을 주고받는 현대 물리학의 시공간 개념이 떠올라 흥미롭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인간(人間)에도 간(間)이 있다. 사람은 사람의 사이에서 정의되는 존재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수많은 ‘사이’의 연결이 모여 세상이 된다. 우리 앞에 곧 닥칠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수많은 ‘사이’의 거리의 재조정과 함께 온다. 그 세상이 보여줄 모습도 결국 ‘사이’들의 거리와 연결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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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4222055005&code=990100#csidx9fb15d12edfc704b342cd07e72aec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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