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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7월 16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7160300035&code=99010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뾰족


저 멀리 뾰족한 고층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뾰족하게 보여도 건물 꼭대기는 가로세로 1m보다 넓어 보인다. 서툰 바느질로 뾰족한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따끔한 통증을 느낀 적도 있다. 바늘 끝은 크게 잡아도 가로세로 1㎜ 안에 들어간다. 가로세로 1m보다 넓은 고층빌딩 꼭대기에는 단면이 가로세로 1㎜보다 작은 바늘을 무려 100만개 이상 꽉 채워 세울 수 있다. 끝부분 단면적이 100만배 이상 차이 나는데, 우리는 왜 둘 모두 뾰족하다고 할까? 물리학자의 고민이 이어진다. 과연, 뾰족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물리학에서 주어 하나만을 가지고 “크다, 작다, 무겁다, 가볍다”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 주변 물리학자들 사이에 난리가 난다. 과학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라서 그렇다. 예를 들어, “지구는 크다”는 어불성설이다. 지구는 달보다 크지만, 해보다는 작기 때문이다. 내 몸무게는 아내보다 무겁지만, 덩치가 큰 사람과 비교하면 거꾸로 가볍다고 해야 한다. “크고 작음” “무겁고 가벼움”과 같은 표현은 비교 대상을 명시해야 과학적 진술이 된다. 지구는 달보다 크고, 아내는 나보다 가볍다.


뾰족하다는 말은 어떨까? 왜 우리는 고층빌딩과 바늘 모두를 비교 대상 없이 주어 하나만을 가지고 뾰족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뾰족하다는 말은 단면적이 작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구가 크다”가 과학적 진술이 아닌 것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 주어 하나만을 가지고 “바늘이 뾰족하다”와 같이 말할 수 없다. 어느 날, ‘뾰족할 첨(尖)’자를 보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큰(大) 것 위에 작은(小) 것이 있을 때 우리가 대상이 뾰족하다고 한다는 것을 이 한자가 알려준다. 뾰족은 큼과 작음의 비율이다. 바늘을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저 멀리 있는 고층빌딩과 함께 보자. 우리가 뾰족하다고 할 때 무엇이 작고(小), 무엇이 큰(大)지는 명확하다. 바늘과 빌딩을 서로 비교한 것이 아니다. 바늘 하나가 가진 두 개의 길이를 서로 비교한 얘기다. 반지름 a인 원을 밑면으로 한, 높이가 b인 원기둥을 떠올려 보라. 우리는 a가 b보다 무척 작을 때 뾰족하다고 한다. 뾰족한 모든 것은 작은 것과 큰 것의 비(a/b=小/大)가 1보다 아주 작은 물체다. ‘뾰족’에 이미 비교의 의미가 들어 있어서, 우리는 주어 하나만으로도 말이 되는 문장을 적을 수 있다. 아내는 나보다 가볍고, 바늘은 뾰족하다.


안내할 내용이 적힌 종이를 게시판에 고정할 때 압정을 쓴다. 뾰족한 쪽을 게시판에 대고 반대쪽의 넓은 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면 압정이 박힌다. 뉴턴의 셋째 법칙인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르면, 내가 압정을 누르는 힘은 압정이 내 손가락을 반대로 밀치는 힘과 크기가 같다. 또 내가 압정을 누르는 힘은 압정의 뾰족한 쪽에도 거의 같은 크기로 게시판에 전달된다. 즉 압정의 뾰족한 쪽이 게시판을 누르는 힘은, 압정이 내 엄지손가락을 반대 방향으로 누르는 힘과 같다. 같은 크기의 힘인데도 왜 내 엄지손가락은 끄떡없고, 압정의 뾰족한 쪽이 게시판을 뚫고 들어가는 걸까?


물리학의 압력을 이용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같은 힘으로 눌러도 접촉 면적이 작으면 압력은 커진다. 뾰족한 끝이 게시판을 누르는 힘과 압정의 넓은 면이 내 엄지손가락을 누르는 힘은 크기가 같지만 접촉면의 면적에 큰 차이가 난다. 압정을 누르는 내 엄지손가락이 멀쩡한 이유다. 혹시 의심이 생긴 독자라면, 다음에는 압정이 아닌 바늘을 엄지손가락으로 눌러 안내문을 게시판에 고정해 보시길.


여성들의 뾰족구두에 보도블록이 깨질 수도 있다. 여성의 몸무게가 무겁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뾰족구두가 뾰족해 보도블록에 닿는 면적이 작아 그렇다. 남성들이 모두 뾰족구두를 신는다면 아마도 보도블록은 남아나지 못할 수도 있다. 뾰족한 대못 여럿이 촘촘히 거꾸로 박힌 널빤지 위에 맨발로 올라선 차력사를 놀라운 눈으로 바라본 어린 시절 기억도 난다. 요즘 다시 이런 분을 보게 되면, 끝이 뾰족한 대못 딱 하나만 박힌 널빤지 위에 한번 올라서 보라고 부탁해볼 생각이다. 물론 이분이 내 부탁을 들어줄 리는 없다. 아주 날카롭게 날이 선 작두일 리도 없지만, 무속인도 발바닥의 길이 방향을 날의 방향으로 해서 작두를 타는 것이 낫다. 작두날의 수직 방향으로 올라서면 발바닥과의 접촉 면적이 줄어 더 위험하기 때문이다. 오랜 수련을 한 차력사, 신 내림 받은 무속인, 모두 다 물리학을 이용한다.


아주 작은 단면적을 가져도 뾰족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小와 大의 크기가 비슷해서, 둘의 비인 小/大의 값이 1에 가까울 때 그렇다. 뾰족한 압정 끝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모래알이 한 예다.


이런 작은 물체는 맨발로 밟아도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발바닥 피부에 약간의 유격이 있어, 작은 모래알을 밟은 발바닥은 부드럽게 모래알을 감싸는 방식으로 조금 변형될 뿐이다. 아픔을 느끼지도, 상처를 입지도 않는다. 밖의 ‘뾰족’에는 나의 부드러움이 상책이다.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세상의 깊은 속내를 송곳처럼 찔러 드러내는 분들이 있다. 통렬한 아픔 뒤에는 깊은 성찰이 이어진다. 나는 이런 분들의 뾰족한 말을 들으면 감탄과 함께 존경의 마음이 생긴다. 하지만, 아픔과 불쾌감만을 주는 말도 있다. 우리를 성찰로 이끌지 않는 ‘뾰족’은 ‘삐죽’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은 깊고 뾰족하지만, 다른 이의 마음에 닿는 나의 말은 뾰족하지 않기를. 다른 이의 ‘삐죽’에 닿는 내 마음은 부드러운 ‘뭉툭’이기를. 삐딱한 세상을 보는 내 시선은 ‘뾰족’이지만, ‘삐죽’은 아니기를.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7160300035&code=990100#csidx03ab02b2e4382e290b0a9c07313b4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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