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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11월 12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11120300015&code=99010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경계

어린 시절 밥 먹으라는 부름을 듣고 뛰쳐나오다 문턱에 발가락을 찧어 아팠던 기억이 난다. 문을 닫으면 문이 안과 밖을 나눠 넘을 수 없는 확실한 물리적 경계가 되지만, 문이 열려 있어도 문턱은 안팎을 가르는 경계다. 배고파 뛰쳐나오다 보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말이다. 초등학생 때 짝꿍과 다투고 나면 곧이어 하는 일이 책상 한가운데에 볼펜으로 선을 긋는 것이었다. 여기 넘어오면 안 돼. 지우개가 바닥에서 저쪽으로 굴러가면 책상에 그은 선이 공해상으로 연장되는지를 두고 다퉜던 기억도 난다. 책상 위의 선처럼, 어느 날 그렇게 하기로 정해 생긴 경계가 더 많다. 내 집 땅과 옆집 땅을 가르는 차이는 지적도에만 있지 땅을 봐선 알 수 없고, 도로 위를 차로 달려 충청도에서 경상도로 접어들 때 표지판 없이 도의 경계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보이지 않는 선을 두고 우리는 나와 너,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셈이다. 눈에 잘 띄는 경계도 있고, 주의를 기울여야 볼 수 있는 경계도 있고, 전혀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도 있다.        

              

경계가 꼭 공간만 나누는 것은 아니다. 시간에도 경계가 있다. 지하철 요금을 내다가 안 내도 되는 지공(지하철 공짜)의 나이에 접어들 때, 우리는 하루 전과 아무 차이 없지만, 시간에 그어진 경계로 지하철 요금이 불연속적으로 변한다. 공간이든 시간이든,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훨씬 더 많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정해 긋는 선이 하나를 둘로 나눈다. 연속에 긋는 경계가 불연속을 만든다.



사람도 경계로 나뉜다. 인종, 성별, 그리고 경제수준이라는 경계도 있다. 5억원을 경계로 세금의 기준을 달리하면, 단돈 10원의 차이로 크게 다른 세금을 낼 수도 있다. 수능 점수 1점으로 인생 경로가 달라질 수 있고, 0.01초의 차이로 육상경기 메달 색깔이 바뀐다. 고등학교 학생을 문과와 이과로 나누기도 했다. 문과로 한번 정해진 학생은 배우는 것, 생각하는 것이 이과 친구와 달라지고, 계곡에서 작은 차이로 갈라선 두 물방울은 하류에 이르면 멀어져 큰 강으로 나뉜다. 세상은 연속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수많은 경계를 짓고 경계로 나뉜 연속은 불연속이 된다.



긋지 않아도 존재하는 경계가 있다. 스스로(自) 그러함(然)을 뜻하는 자연은 경계도 스스로 정한다. 99도에 끓지 않던 물은 100도가 되면 끓는다. 물의 끓는점을 100도라 한 것은 사람의 약속이지만, 우리가 100도라 부르기 전에도 물은 이 온도에 끓었다. 물의 끓는점은 자연이 스스로 정한 경계다. 자연은 저절로 경계를 향해 나아가 그곳에 머문다. 끓는점에 도달한 물은 계속 끓어도 100도에 머물고, 세균도 주어진 환경이 허락한 숫자 이상으로 늘지 못한다. 달려서 오른 체온은 땀으로 식히고, 추운 날 떨어진 체온은 떨림과 닭살로 올린다. 오르면 내리고 내리면 올려 체온은 자연이 정해준 경계를 향한다. 자연은 스스로 정한 자연의 경계를 향해 끊임없이 스스로 다가선다.



다른 곳에도 경계가 많다. 쿼크부터 원자핵과 전자를 지나 원자까지는 주로 물리학의 영토이지만, 원자를 넘어 분자가 되면 이제 주로 화학의 영역이고, 애매한 접경을 지나 생체 안 거대분자와 세포에 이르면 생물학과 의학의 영토다.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본 세포의 모습에서 화학과 생물학을 가르는 경계선을 본 사람은 없고, 사진을 찍은 분자의 모습에 물리학자 출입금지 푯말은 보이지 않는다. 현대 과학은 지방분권이 대세이지만, 옆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았던 오래전 작은 마을이 부럽다. 자연은 나뉘지 않는데, 우리는 나눈다.



어떤 경계는 자연이 스스로 정하고, 어떤 경계는 없는데 우리가 만든다. 우리가 설정한 경계는 양쪽의 구별을 만들고 시간이 지나 구별은 장벽이 된다. 넘어서본 사람만 경계를 만나고, 넘지 않은 사람은 경계를 보지 못한다. 요즘 내가 사는 집에는 문턱이 없고, 방에서 나오다 발가락을 찧을 일도 이제는 없다. 문턱은 조심할 것이 아니라 없애야 할 것이 아닐까. 문턱이 사라지면 발가락을 찧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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