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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20년 1월 1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1012048015&code=99010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허공


1977년 미국에서 발사한 보이저 1호는 지금도 저 먼 우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90년 명왕성 정도의 거리를 지날 때, 보이저 1호는 카메라를 돌려 우리 지구가 담긴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냈다. 사진 속 지구는 정말 작아 보인다.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이 사진에서 얻은 영감과 통찰을 담아 <창백한 푸른 점>을 출판하기도 했다. 눈에 잘 띄지도 않을 저 작은 푸른 점 위에서, 때로는 복작복작 싸우고 미워하고, 때로는 서로 돕고 사랑하며, 우리 모두는 짧은 삶을 산다.


태양과 지구 사이의 평균거리를 1천문단위(AU)라 한다. 보이저 1호는 인류가 우주로 보낸 모든 것 중 현재 가장 멀리 있어, 약 150천문단위의 거리에 있다. 지구에서 명왕성까지 거리의 3배가 훌쩍 넘는 거리다. 이 정도로 엄청난 거리도 우주의 막막한 규모와 비교하면 별것 아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별은 당연히 태양이다. 두 번째로 가까운 별은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가도 4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다. 보이저 1호가 이만큼의 거리에 도달하려면 수만년이 걸린다. 밤하늘에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별은 우주의 허공 속에서 정말 드물게 만날 수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우주의 대부분은 물질이 아니다. 허공이다.


원자는 작다. 정말 작다. 가는 머리카락 한 올의 너비 방향으로 100만개를 나란히 늘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다. 이렇게 작은 원자도 내부가 있다. 원자의 크기는 가운데 놓인 원자핵에서 가장 바깥쪽 전자까지의 거리다. 원자핵의 크기도 정말 작다. 수소원자라면, 원자의 중심에 있는 원자핵은 양성자 하나인데, 그 크기는 수소 원자의 10만분의 1이다. 머리카락 한 올의 폭에 나란히 놓으면 수소원자의 원자핵 1000억개를 늘어놓을 수 있다(양의 전하를 띤 원자핵은 서로 밀쳐내어 정말로 이렇게 나란히 물리적으로 올려놓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크기 비교일 뿐이다. 이 글 읽는 물리학자들이여, 진정하시라). 1000억은 과학의 다른 분야에서도 우리가 자주 들어본 익숙한 숫자다. 은하 하나에 들어 있는 별의 수가 이 정도고, 우주에는 또 이런 은하가 수천억개 있다. 사람의 머릿속 뇌 안 신경세포의 수가 또 1000억 정도다. 머리카락 한 올의 너비 위에 은하의 별만큼 원자핵을 올려놓을 수 있다.


원자의 구조를 태양계에 비유하고는 한다. 계산해보니, 수소의 원자핵이 태양 크기라면, 수소가 가진 딱 하나의 전자는 명왕성보다 10배 더 먼 거리에 있는 셈이다. 양의 전하를 띤 원자핵과 음의 전하를 띤 전자 사이의, 태양계 크기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건너뛴 서로의 원거리 끌림이 원자를 만든다. 40년이 넘는 시간 보이저 1호가 항해한 거리는 원자핵과 전자 사이 거리의 3분의 1일 뿐이다. 보이저 1호는 오랜 항해 중 멋진 목성과 토성이라도 맘껏 구경했지만,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우주의 만물을 구성하는 대부분은 물질이 아니다. 물질 사이의 허공이다. 막막한 우주여행에서 별과 행성이 아주 드물게 마주칠 수 있는 소중한 존재라면, 물질의 내부도 마찬가지다. 원자핵에서 출발한 상상의 보이저호는 아무것도 없는 엄청난 규모의 허공을 가로지른 후에야 전자에 닿을 수 있다.


원자의 구조를 태양계에 비유하는 것이 그럴 듯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둘은 다른 점이 많다. 태양계 행성의 움직임은 고전역학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원자핵 주위의 전자 상태를 설명하려면 고전역학과 다른 양자역학이 필요하다. 전자는 행성처럼 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도 없어서, 전자의 궤도를 행성의 궤도로 빗대는 것은 물리학자에게는 아주 많이 틀린 얘기로 들린다. 다른 차이도 있다. 물리학의 표준모형에 따르면, 태양계의 행성으로 비유한 전자는 놀랍게도 크기가 없다. 명왕성까지 거리의 10배 떨어진 곳에서 크기 없는 점 하나가 돌고 있는 것이 원자다. 태양으로 비유한 수소의 원자핵은 세 개의 쿼크로 이루어져 있는데, 쿼크 하나도 또 크기가 없다. 전자와 쿼크뿐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다른 기본입자들에 대해서도 표준모형은 크기를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크기가 있다면 내부가 있고, 내부가 있다면 그 입자는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근본적인 입자일 수 없기 때문이다.


크기가 없는 것들이 모여 허공으로 가득 찬 원자를 만든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점’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는 존재니, 물리학의 기본입자들은 수학의 점을 닮았다. 길이도, 넓이도, 부피도 없지만, 어디 있다고 위치는 말할 수 있는 존재다. 근대철학자 데카르트는 정신과 다른 물질의 근본적인 속성으로 ‘연장(延長)’을 얘기했다. 틀렸다. 쿼크와 전자는 정신과 물질을 나눈 데카르트 이원론의 구분으로는 엄연한 물질이지만, 연장이라는 속성을 갖지 않는다. 심지어, 연장도 없고 질량도 없는 물질도 있다. 빛을 구성하는 입자인 빛알(광자)이 그렇다.


지구는 크기뿐 아니라, 위치도 보잘것없다. 우리 은하의 변방에 놓인,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항성 주위를 도는 눈에 띄지 않는 작은 행성이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우주와 그 안에 놓인 한없이 작은 지구를 함께 떠올리면서, 인류의 보잘것없음에 실망하는 이가 많다. 이 작은 지구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대한 무상함, 작은 지구 위를 살아가는, 지구보다 훨씬 더 작은 존재인 한 사람의 인생의 덧없음을 떠올릴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로 구성된 우리 인간도 결국은 크기가 없는 기본입자들의 모임임을 깨닫고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나도 그렇다. 우주의 막막함과 그 안에 놓인 인간 존재의 사소함을 대할 때면 나는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글귀를 떠올린다. 우리 인류는 엄청난 크기의 우주의 허공 속에 놓인, 보잘것없지만 소중한 존재다. 크기가 없는 기본입자와 그 사이의 허공으로 구성된 물질이 긴 진화의 과정을 거쳐 이성적인 존재로 거듭난 것이 인간이다. 허공으로 가득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이성의 힘으로 스스로 깨달은, 우리가 아는 유일한 존재가 우리다. 인간은 보잘것없어 더욱 소중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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