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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28
금속, 자석, 유리처럼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물질에서부터 많이 들어봤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반도체와 부도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물리학의 두 난제 초전도체와 암흑물질까지, 11가지 물질을 통해 물리학의 최전선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각 분야 국내 최고의 물리학자 11명이 뜻을 모아 물질 발견과 발명의 역사, 그리고 최첨단 물질물리학과 산업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과학의 역사는 같은 이름 아래 다른 모습으로 재발견된 물질의 사례로 넘쳐난다. 이 책에 담긴 그 사례들과 저자 자신들의 연구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물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어떻게 연구하는지,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인지, 남아 있는 질문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도 엿볼 수 있다. 물질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물론 현대 물질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대한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경향신문 2022.12.8]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전파라 좋은 것도, 전자파라 나쁜 것도 아니다
2022-12-12경향신문 2022년 12월 8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2080300015 방송국 전파로 라디오를 들으며 전자파 유해성 기사를 읽는다. 음악을 듣게 해주는 전파는 고맙지만, 전자파는 왠지 피하고 싶다. 전파는 좋은 것이고, 전자파는 나쁜 것일까?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전자파는 표준 용어가 아니어서 전자기파로 부르는 것이 맞다. 전파도 좀 이상하다. 자연에는 전파(電波)와 자파(磁波)가 따로 없어, 둘은 서로를 만들어내며 전자기파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영어로 radio wave인 전파를 직역해 라디오파라고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전기만의 파동으로 오해하는 이는 없고, 이미 널리 쓰여 이제 와서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물리학은 자연을 객관적인 실체로 기술하고자 하지만. 어쨌든 인간은 인간의 언어로 자연을 기술한다. 전기(electricity)는 호박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elecktron이 어원이다. 보석의 일종인 호박을 천으로 문지르면 곁에 놓인 작은 물체를 잡아당기는 현상이 전기의 어원이다. 자기(magnetism)는 자석으로 쓰이는 자철광의 산지 고대의 마그네시아(Magnesia)가 어원이다. 조선시대 참료의 시에 침개상투희유연(針芥相投喜有緣)의 글귀가 있다. 침개상투는 “바늘(針)이 자석에 이끌리고, 작은 겨자씨(芥)가 호박에 이끌리듯 서로 마음을 나눈 친구”를 뜻하는 고전 글귀에서 따온 얘기(정민의 <우리 한시 삼백선: 7언 절구 편>)라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기와 자기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자연현상이다. 대학생 때, 같은 방향으로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자기력이 생긴다는 것을 배우고 고개를 갸웃한 기억이 있다. 첫 번째 도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전자가 보면 두 번째 도선의 전자는 나란히 같이 움직여 정지한 것으로 보인다. 둘 사이에는 서로 밀어내는 전기력이 작용할 것 같은데, 왜 두 도선은 서로 잡아당길까? 금속 도선 안에서 양전하를 띤 원자핵들은 제자리에 가만히 머물러 있고 전자들은 도선 안을 자유롭게 움직인다. 첫 번째 도선에서 움직이는 전자가 두 번째 도선의 원자핵을 보면 어떻게 보일까?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은 정지한 관찰자가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운동 방향으로 길이가 줄어든 모습을 본다는 것을 알려준다. 첫 번째 도선의 전자가 보면 두 번째 도선의 양전하를 띤 원자핵들은 더 조밀하게 배열되어 더 높은 양전하 밀도를 가진 것으로 보이게 된다. 한편, 두 번째 도선의 전자들은 첫 번째 도선의 전자와 함께 나란히 같은 속력으로 움직여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여서 두 번째 도선의 음전하 밀도에는 길이 수축 효과가 없다. 결국, 첫 번째 도선의 전자가 힐끗 옆 도선을 보면 그곳의 양전하 밀도가 음전하 밀도보다 더 커보이게 되고, 두 도선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이 존재하게 된다.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자기력은 전하 사이의 전기력에 특수상대론의 길이 수축 효과를 적용한 결과다. 전파는 라디오파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나아보이고, 전자파 대신 전자기파로 부르는 것이 맞다. 주변 물리학자들이 더 아쉬워하는 것이 속도와 속력이다. 중력, 전자기력처럼 힘력(力)이 들어 있는 용어 중에는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진 벡터가 많다. 한편, ‘온도’나 ‘습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도’자를 돌림자로 갖는 양들은 크기는 있지만 방향을 갖지 않는 스칼라가 많다. 내가 동쪽 방향으로 힘을 주어 물체를 밀 수는 있어도 온도를 동쪽 방향으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다른 물리량과 비교하면, 속력을 벡터로 그리고 속력의 크기를 속도로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거꾸로다. 바꾸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정착되어 널리 이용되는 과학의 용어에도 맥락과 역사가 담겨 있어 용어의 갑작스러운 변경은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파라고 좋은 것도, 전자파라고 나쁜 것도 아니다. 전자파는 학술용어가 아니어서 전자기파라고 부르는 것이 맞고, 전파는 방송에 사용하는 파장이 긴 전자기파를 일컬을 뿐이다. 어쨌든 우리가 특정 용어를 서로 다른 구체적인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이 흐름으로 이어지면 과학의 개념에 가치의 판단을 담게 되는 것은 늘 주의할 일이다. 고립계의 엔트로피가 늘어난다는 사실로부터 엔트로피는 나쁜 것이니 줄여야 한다는 당위의 주장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과학은 자연을 말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말한다. 과학 용어가 담긴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안에 담긴 사실과 가치를 늘 저울질할 일이다.
[경향신문 2022.11.1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때로는 막고 때로는 돕는, 물리학의 간섭
2022-11-14경향신문 2022년 11월 10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211100300005 내 일에 간섭하지 마! 무언가를 하려는데 다른 이가 막아설 때 우리가 하는 말이다. 우리 삶에서 간섭은 이처럼 방해나 훼방의 뜻을 가질 때가 많다. 하지만 물리학의 간섭은 이와 달라, 서로 만나 줄어드는 소멸(destructive)간섭도, 만나서 커지는 보강(constructive)간섭도 있다. 물리학의 간섭은 때로는 막고 때로는 돕는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빛과 소리를 포함한 모든 파동은 진행하며 서로 간섭한다. 긴 줄의 양 끝을 두 사람이 나눠 잡고 시간을 맞춰 동시에 위아래로 휙 움직이자. 양 끝에서 만들어진 두 파동은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 한가운데에서 만나고, 그곳에서 줄은 위아래로 큰 폭으로 떨린다. 이처럼 결이 맞은 두 파동이 더해져 진폭이 늘어나는 것이 보강간섭이다. 두 파동이 만나 이루는 합성 파동의 진폭이 0이 될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줄 끝을 위아래로 휙 움직여 파동을 만드는 바로 그 순간, 다른 쪽 끝을 잡고 있는 사람은 거꾸로 줄을 아래위로 휙 움직여 파동을 만들 때 그렇다. 위아래가 뒤집힌 모습의 두 파동이 진행해 가운데에서 만나면 덧셈이 아닌 뺄셈이 되어 그곳에서 진폭이 0이 되는 소멸간섭이 일어난다. 결이 딱 맞는 둘이 만나면 늘어나지만, 결 맞지 않아 많이 다른 둘이 만나면 거꾸로 줄어든다. 반대 방향으로 진행해 가운데서 만난 두 파동은 잠깐의 만남과 간섭 후에 제 갈 길을 계속 이어간다는 것도 중요하다. 이처럼 파동은 만남을 쉬이 잊어, 시간이 지난 둘의 만남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빛은 입자일까. 파동일까? 한눈팔지 않고 곧게 달려가는 빛의 직진과 빛의 반사는 빛을 입자로 간주한 페르마의 최소시간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또, 매질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빛의 굴절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모래사장 위를 달리다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는 해변 구조요원을 닮아, 이것도 빛을 입자로 보아 설명할 수 있다. 빛의 입자설을 강하게 주장한 사람이 바로 고전역학을 완성한 뉴턴이다. 그의 권위로 빛의 입자설이 힘을 얻고 있던 17세기 말, 빛의 파동설이 등장해 점점 세를 불리게 되었다. 빛이 마치 당구공과 같은 입자라면 둘이 만나 사라질 리 없다. 하지만 두 빛은 서로를 상쇄해 소멸간섭을 보이기도 한다. 소멸간섭은 빛을 입자가 아닌 파동으로 간주해야 이해가 쉽다. 당대의 물리학자들이 빛의 입자설에 고개를 갸웃한 이유는 더 있다. 정말로 빛이 크기가 있는 입자라면, 당신의 얼굴에서 반사해 내 눈으로 진행하는 빛의 입자는 거꾸로 내 얼굴에서 반사해 당신의 눈으로 향하는 빛의 입자와 도중에 부딪쳐 방향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정말로 크기를 가진 입자라면 우리 둘은 서로를 동시에 또렷이 마주 볼 수 없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소리가 입자의 운동이라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 입에서 떠난 소리의 입자가 당신의 입에서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소리의 입자와 만나면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가 줄어, 동시에 말하는 둘은 서로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없게 된다. 소리가 입자의 운동이라면, “밥 먹었니? 오버” “응, 먹었어. 오버”처럼, 한 번에 한 사람만 말할 수 있는 무전기처럼 대화가 이어질 수밖에. 둘이 마주보고 소곤소곤 대화를 연이어 나눌 때 물리학의 파동을 떠올릴 일이다. 소리와 빛은 이처럼 파동으로 존재해, 각각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 두 파동은 두 사람 사이의 공간 어딘가에서 만나 간섭한 후 곧이어 제 갈 길을 계속 이어간다. 서로를 마주 바라보며 함께 속삭일 수 있는 이유는 빛과 소리가 파동이기 때문이다. 정겨운 시선과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만남은 각자의 삶에 흔적을 남기지만, 둘의 경이로운 만남은 만남을 쉬이 잊는 파동에 빚지고 있는 셈이다. 물리학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도 간섭이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내 생각과 다른 누군가의 말을 들을 때, 그의 목소리도 결국 물리학의 파동임을 떠올릴 일이다. 쇠귀에 경 읽듯, 투명 매질을 통과하는 빛처럼, 흔적 없이 마음을 스쳐지나갈 수도 있지만, 당신의 간곡한 부탁에 내 마음의 결을 맞추면 안 될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막는 간섭도, 돕는 간섭도 있다. 어떤 간섭은 막기도 한다. 끔찍한 재난으로 결 맞아 함께 슬픈 모두의 마음을 돌아보며, 재난을 미리 막을 수 있었던 간섭의 부재에 분노한다. 결 맞은 마음 모아 더 커진 목소리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함께 힘을 모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