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향신문 2023.04.27]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생명의 장엄함을 보며 떠올린, ‘변이’의 힘
2023-05-02경향신문 2023년 4월 27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4270300015 진화론을 ‘유전적 변이의 차별적 선택’으로 줄여 말할 수 있다. 변이를 가져 부모와 다른 자식 중 일부는 성공적으로 생존하여 같은 변이를 가진 손자손녀들을 만들어낸다. 살아남은 개체만 다음 세대의 후손을 남기니 무척 당연한 얘기다. 유전되지 않는 변이는 진화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으니, ‘변이’ 앞 ‘유전적’도 중요하다. 다윈 진화론의 얼개를 이해하고 나면 이처럼 자명한 진실이 발견될 때까지 그처럼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진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진화의 메커니즘이 작동하려면 변이는 필수다. 변이가 전혀 없어 똑같은 후손들만이 태어나는 생물종은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멸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변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생물종이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하지만 변이의 확률이 너무 커도 문제다. 우연적 변이 대부분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낳아도 어차피 생존하기 어려운 자손을 소중한 생물학적 자원을 동원해 과도하게 만들어내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유전적 변이의 확률이 너무 작으면 멸종으로 이어지고, 확률이 너무 크면 낭비가 발생한다. 변이는 진화의 분명한 원인이자 자명한 결과다. 자식 하나의 크기가 아주 작아서 별 어려움 없이 수많은 자식세대 개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종은 높은 변이 확률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1000마리 자식 가운데 딱 10마리만 생존을 해도, 후손들도 같은 방식으로 대를 이어가면 몇 세대만 지나도 엄청난 숫자가 된다. 높은 변이 확률은 고위험 분산투자를 닮았다. 대부분의 투자는 쫄딱 망해 아무런 수익이 없지만, 극히 일부의 투자가 성공을 하면 엄청난 수익으로 돌아오는 셈이다. 나와 다른 유전형을 가진 자손을 변이로 만들어내고 이 중 성공적인 변이를 가진 자손이 대를 이어가는 진화의 메커니즘 자체도 이처럼 진화가 만들어낸 것이다. 진화의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는 생명체는 진화를 통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없으니, 진화가 진화를 스스로 만들어낸 셈이다. 우주에 우리 아닌 다른 생명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오리, 아니 오광년(光年)무중이지만, 생명이 있는 모든 곳에서는 진화의 메커니즘이 자연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물리학은 우주적 규모의 자연법칙의 보편성을, 생물학은 우주적 규모의 진화의 보편성을 말한다. 우주 어디서나 같은 빛의 속도와 생명의 진화를 스스로 발견해낸 우리 인류는 드디어 우주적 규모의 물리학 학회와 생물학 학회에 참석할 자격을 얻었다고나 할까. 자연에서 진화를 배운 인간은 이를 과학에 이용하기도 한다. 유전 알고리즘이라고 불리는 재밌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에서 ‘유전 알고리즘 그네타기’로 검색해 볼 수 있는 동영상이 있다. 마구잡이로 움직여 그네를 잘 타지 못하는 개체들로 0세대 집단을 구성하고, 조금이라도 더 잘 타는 개체들만으로 다음 세대를 생성한다. 자식 세대의 개체를 생성할 때, 유성 생식하는 현실 생명처럼 유전자의 변이와 조합도 허락한다. 이러한 유전 알고리즘을 따라 여러 세대가 이어지면, 그네를 몹시 잘 타는 개체들이 자연스럽게 출현하게 된다. 어떻게 그네를 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고리즘으로 구현된 진화의 힘만으로 그네를 잘 타는 인공 개체들이 결국 생성된다. 진화는 놀라운 시계를 만들어내는 인간 시계 장인을 닮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눈이 멀어 엉뚱한 조합으로 수없이 많은, 작동하지 못하는 시계를 만들어내지만, 엄청나게 긴 시간이 허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화는 엄청나게 긴 시간을 수명으로 가진 눈먼 시계공이다. 동양 고전 <대학>에 은나라 탕왕이 매일 스스로 다짐했던 글귀가 나온다. 바로,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이다. 하루하루 새롭게 하는 것을 재귀적으로 다시 반복하는 것은 모든 생명이 계속 이어가는 진화의 모습이기도 하다. 진화가 만들어낸 온갖 생명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보며 변이의 힘을 떠올린다. 우리 모두는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숨 가쁘게 달려갔던 선조들의 후예다. 4월 중순에 피어 꽃말이 ‘중간고사’라고 농담했던 벚꽃은 올해는 3월 말에 피었다. 때 이른 개화를 보며 환경의 변화를 절감한다. 환경이 변하면 우리 삶의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기나긴 세월 우리 인간을 만들어낸 진화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바꾸지 않으면서 생존의 헛된 꿈을 꾼 생명은 없다. 삶의 방식의 변화는 미래의 여전한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경향신문 2023.03.30] [김범준의 옆집물리학] 물리학의 다음과 ‘다음 소희’는 지금이 정한다
2023-04-11경향신문 2023년 3월 30일에 실린 기사 발췌 출처: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303300300005 길에서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자니 아쉬워 친구가 다음에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말한다. ‘다음’이 정확히 언제냐고 묻지는 말자. 갑자기 말 더듬으며 당황하는 친구 얼굴을 보게 될 테니. 그냥 “그래, 다음에 보자”가 적당하다.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는 시간의 순서로 일어나는 사건 중 현재를 기준으로 미래의 정해지지 않은 시점을 ‘다음’이라 할 때가 많다. 다음은 언제가 아니다. 다음은 시간의 화살을 따라 늘 미래를 향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먼저(pre-) 말하는(dict) 것이 예측(predict)이어서, 물리학은 다음을 지금 말하는 예측에 관심이 많다. 고전역학에서 지금 이 순간의 물체 위치와 속도를 알면 다음 순간의 물체 위치와 속도는 딱 하나로 정해진다. 지금의 상태가 다음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은 양자역학도 마찬가지다. 다음의 상태는 결정론적으로 지금 정해지지만 주어진 양자 상태에 대한 측정과 관찰의 결과가 확률로 주어질 뿐이다. 물리학의 다음은 지금이 정한다. 뉴턴의 고전역학에서는 물체에 주어지는 지금의 힘이 지금의 가속도(加速度)를 결정한다. 지금의 가속도를 알면 다음의 속도를 알고, 지금의 속도를 알면 다음의 위치를 안다. 지금으로부터 바로 다음을 알아내는 과정을 시간 축을 따라 한 단계 한 단계 조금씩 계속 이어가면 아무리 먼 미래라도 지금 예측할 수 있게 된다. 고전역학으로 이해하는 운동 중 가장 간단한 것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 없는 경우다. 힘이 없으면 가속도가 없고, 가속도가 0이면 속도(速度)에 더해지는(加) 것이 없어 다음의 속도는 지금의 속도와 같다. 물체는 지금의 속도와 정확히 같은(等) 속도로 계속 움직이는 등속(等速) 운동을 하게 된다. 물리학에서 속도는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린 화살표처럼 방향과 크기를 함께 갖는 벡터다. 등속으로 운동해 속도가 늘 같다는 말은 물체가 움직이는 빠르기뿐 아니라 움직이는 방향도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등속 운동을 하는 물체는 늘 속도가 같아서 시간이 지나도 늘 같은 빠르기로, 그리고 늘 같은 방향인 직선을 따라 움직인다. 힘이 없다면 다음은 지금과 늘 같다. 고전역학의 다음을 지금과 다르게 하는 것이 물체에 작용하는 힘이다. 가벼운 물체의 다음 경로를 바꾸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질량이 작은 물체는 약한 힘에도 크게 반응해 커다란 가속도를 만들어 속도를 크게 바꾸고 미래의 위치도 크게 달라진다. 하지만 질량이 커 관성도 큰 물체는 지금과 다른 다음을 위해서 큰 힘이 필요하다. 물리학뿐 아니다. 사회와 시대에도 관성이 있다. “원래 늘 그랬던 것인데 뭘 유난하게”의 마음가짐이 사회의 관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다. 세상에 “원래 그랬던 것이어서 다음에도 늘 그럴 것”은 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험하고 목격했던 학교에서의 체벌은 이제 먼 과거의 얘기고, 도대체 여자가 무슨 법대를 가고 의대를 가냐는 그릇된 생각도 이제 거의 사라졌다. 절대로 바뀔 수 없는 것은 세상에 없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눈 질끈 감으면 다음은 지금과 같아서, 다음을 바꾸려면 지금 바꿔야 한다.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를 인상 깊게 관람했다. 최준영 작가의 인문학공동체 수원 ‘책고집’에서 열린 감독과의 대화시간에도 참석했다. <다음 소희>는 현장실습을 나간 한 특성화고 학생 소희의 이야기다. 소희의 안타까움에 관객이 절절히 공감할 수 있는 영화지만, 영화 속 여러 가해자는 다른 의미에서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소희의 자살 이전 자취를 따라 범인(犯人)을 쫓는 형사가 결국 마주친 이들은 숱한 범인(凡人)이었다. 엄청난 관성을 가진 거대한 사회 구조는 가해자가 다시 피해자가 되는 계층구조의 연쇄 사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사슬의 가장 끝단에 소희가 있었다. 영화 제목 <다음 소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인 소희의 안타까운 죽음 뒤에도 이어질 다음 소희를 일반명사로 말한다. 힘이 존재해야 지금과 다른 다음이 만들어지는 물리학을 떠올리며, 모두의 힘이 함께 모여 달라질, 다음 소희가 사라진 소희 다음을 소망한다. ‘다음에도’를 ‘다음에는’으로, 그리고 ‘결코 다시는’으로 바꾸는 것은 여럿의 부릅뜬 눈이다. 세월호·이태원 참사를 겪고 <다음 소희>를 보면서 ‘결코 다시는’을 애써 떠올린다. 다음에는 달라질 것이라 누가 말하면 다음이 도대체 언제냐고 따져 물을 일이다.
2023-03-28금속, 자석, 유리처럼 너무나 흔하고 평범한 물질에서부터 많이 들어봤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반도체와 부도체,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물리학의 두 난제 초전도체와 암흑물질까지, 11가지 물질을 통해 물리학의 최전선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각 분야 국내 최고의 물리학자 11명이 뜻을 모아 물질 발견과 발명의 역사, 그리고 최첨단 물질물리학과 산업의 이모저모를 들려준다. 과학의 역사는 같은 이름 아래 다른 모습으로 재발견된 물질의 사례로 넘쳐난다. 이 책에 담긴 그 사례들과 저자 자신들의 연구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물질’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물리학자들은 실제로 어떻게 연구하는지, 좋은 질문이란 어떤 것인지, 남아 있는 질문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통찰도 엿볼 수 있다. 물질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물론 현대 물질세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물질’에 대한 교양을 쌓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